偶像을 찾는 한국의 슬픈 自畵像
[강상종 칼럼] 한국국민은 허상(虛像)을 찾는 허상(虛想)에서 깨여나야 한다.
 
강성종
比較神話의 大家 Joseph Campbell 은 천면영웅(千面英雄 Hero with Thousand Faces) 이라는 책에서 唯一神話 (Monomyth) 를 英雄旅程(Hero’s Journey) 이라고 묘사(描寫)하는데 요약하면

영웅은 일상생활에서부터 용감하게 출발해서 초자연적인 기적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엄청난 힘에 부딪치며 결정적인 승리를 한다. 영웅은 다시 신비적인 모험으로부터 자기국민에게 정신적 은혜와 물질적 이익을 가지고 돌아온다.

리는 얘기로 시작한다. 예수교 불교 등 종교가 범람하고 있는 한국사회는 Joseph Campbell 이 말하는 영웅을 기다리는 사상이 너무 지배적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이러한 영웅에 매달리면서도 아무런 영웅에게도 만족 못하고 있다. 항상 새로운 영웅에 대한 갈증에서 영웅을 찾고 있다. 認知의 발달과 무관하게 有形宗敎 (tangible religion)와 迷信을 찾고 있다. 영웅은 기적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종교는 종종 迷信의 形象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웅은 예수나 부처처럼 선험적 영웅으로 변신한다. 예를 들면 예수는 평범한 세계로 돌아오지만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時空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그의 주검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영생을 불어넣어준다.

예수가 아니라 예수교가 말하는 영생은 물질적인 영생을 말하기 때문에 무한한 매력을 갖는다. 불교에는 영생이라는 말이 없다. 그래서 매력을 못 느낀다. 우리는 정신적 영웅을 원하지 않는다. 물질적 기적이나 혜택을 가져다 주는 영웅이래야 한다. 이러한 영웅과 기적의 갈망은 정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정주영의 대통령출마에 국민이 환성(歡聲)을 올린 것이 좋은 출발점이다. 정주영이 無에서 기적(奇蹟)의 富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것을 나라에 적용하면 나라도 그렇게 현대그룹처럼 富國이 된다고 믿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선험적인 영웅으로 변신하지 못했다. 그는 영웅여정(英雄旅程 Hero’s Journey)의 길을 밟지 않았다.

그 다음 혜성처럼 나타난 영웅은 황우석이다. 연구비나 많이 받아보자는 간단한 일로 시작했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영웅이 되길 원하지 않았겠지만 언론과 국민 모두가 그가 영웅이 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그 다음에 그는 사회가 만든 우상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정부는 증명도 안된 사람에게 무궁화훈장을 수여했고 단 한번도 검증이 안된 사람에게 당시 경기도지사로 있었던 손학규는 지금 경기 바이오텍을 황우석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바꿀 뿐만 아니라 황우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신병환자들이니까] 격리 수용해야 한다고 극한의 말을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거짓과 참을 떠나서 황우석을 의심하는 것은 반국가적이고 매국행위로 이미 판결이 나왔다. 심리전재결(審理前裁決 verdict before trial)이라는 패리(悖理)는 법조계뿐만 아니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잡고 있다.

다른 세상에서 喜悦에 陶醉되었거나 敎化되어 영웅은 자기국민에게 정신적 은혜와 물질적 이익을 주기로 약속한 보통세계로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황우석의 조직적 사기행각은 포항공대의 BRICKS 라는 신문에 잘 표현된다. 포항공대 대학원생이 쓴 조그마한 글과 프레시안 인터넷 신문이 이를 추적 함으로서 밝혀 젓는데 BRICK 의 기고문을 보면 슬프기 짝이 없다. 제목이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라고 시작한 것이다. 즉 진실을 밝히면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한국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떻게 논문의 시작이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여야 하는가? 생물학을 전공한 푸레시안 강양구기자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를 밝혀냈다. 650억이라는 돈을 처들인 황우석 사기행각은 당시 정권의 박기영 과학기술 보좌관, 김우식 과기부장관에서부터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시간을 끌면서 거짓말이 무당 굿으로 진실로 변화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포항공대 대학원학생의 폭로는 국민이 만든 우상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가 없다.

영웅을 찾는 작업이 끝나면 원천을 파고들거나, 남녀 혹은 동물의 인격화를 통해서 모험가 [영웅]는 인생을 바꿀만한 戰利品을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철저한 단일신화의 규범은 영웅은 智慧의 詩歌인 金羊毛나 잠자는 공주를 인류에게 가져와서 정신적 은혜나 물질적 이익이 사회나 국가나 천체(天体 ). 그러나 책임은 거절된다. 부처도 巨大的 成功 후에도 이러한 국민적 요구가 잘 소통 되였는지 의심했었다.

우상숭배의 다음얘기는 문국현의 대통령출마다. 문국현이 대통령으로 출마를 시사했을 때 한국은 오랫동안 목마르게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이 사람을 보라 라고 (Ecce Homo!). 문국현은 미국 종이회사의 한국지사장으로 기업을 잘 키워서 미국의 신임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대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국민이 원하고 있는 model 이다. 즉 문국현에 대한 갈망도 정주영 때와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갈망이다. 계속 우리는 돈에 대한 갈망으로 전 나라가 도배가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명박도 현대건설 사장이니 잘 할 것이 라는 것이다. 그는 전과 14범으로 BBK 사건이 재판에 걸려있는 상황이었지만 국민은 도덕이고 범죄고 소용없다는 것이다. 밥만 잘 먹여주면 된다는 것이다. 도덕이 밥 먹여 주느냐가 국가의 철학이 되고 말았다. 이 시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이 잘 사는 기간 이였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우상을 갈망하고 있다. 목마르게 바라던 우상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이 우상이 아니라 허상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그 우상을 버리고 새로운 우상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또 새로운 우상을 갈망하고 산다. 그러나 우리는 우상을 갈망하는 우리를 부정한다. 지금 있는 사람들은 다 썩어있기 때문에 새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황언자패(謊言者悖 Liar’s Paradox)과 같다. Crete 사람인 Epimenides가 모든 Crete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라고 얘기했을 때 이 얘기 또한 거짓말이 된다. 성경 시편 116장 11절에 다윗 왕이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라고 했을 때 다윗 왕 또한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썩은 사람이 썩은 사람들 중에서 깨끗한 사람을 찾고 있는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까지 우상을 기다려야 하는가? 기독교 교회도 단일신화로 세상에 다시 돌아온 영웅 보다는 자기교회의 목사를 우상으로 만들고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까지 손에 잡히는 우상을 기다려야 하나? 언제까지 고도 (Godot)를 기다리며 살 것인가?

정주영, 황우석, 문국현,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우상을 만들고 죽이고 [blastoclast] 하는 連續線上에서 허상의 희망과 절망 속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사회적 정신분열증에서 기인된다. 이는 역사적 한국을 잃어버렸고 잊어버린 歷史的孤兒의 한국이 가지고 있는 共通된 社會病이다. 대표적인 예가 노무현 정권시절 이해찬이가 국무총리 현직에서 역사적인 3.1절 행사 참관을 거부하고 골프를 치고 놀았다는 사실과 그가 문교부장관으로 있으면서 역사를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바꾼 것 등이다.

우상을 찾는 국민의 작업은 계속된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정치희극이 바로 그것이다. 고도로 계산된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퇴를 놓고 그 뒤에 숨어있는 전략에는 별로 흥미가 없다. 우상의 공백을 채워야 하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희망제작소와 청춘 콘서트가 대표적인 예다. 나는 이 두 단체가 전국을 순회하는 곡마단인줄로만 알았다. 사실 곡마단이 정확한 말인지도 모른다. 이 두 단체는 제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국가적 우상의 이미지로 까지 끌어올리고 싶어하는 한국인의 자화상은 슬플 뿐이다. 문제는 언론이 이것이 바로 우상이다라고 제시를 했고 우상을 찾고 있는 국민에게 해답을 준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그러나 언론은 국민이 원하는 것을 제시했을 뿐이다. 안철수 서울시장 출마 설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누가 거짓말이 라고 하면 참말이라고 하고 참말이라 하면 거짓말이라고 한다.
 
얘기는 청춘 콘서트에서 희망제작소로 넘어간다. 탈변(蜕变 metamorphosis)인지 변모(变貌 transfiguration)인지 모르지만 무의미하기 때문에 알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안철수와 박경철은 청춘 콘서트라는 煙幕을 치고 등장한다. 우상을 갈망하는 자리를 매꿔주기만 하면 된다. 안철수의 이미지 또한 황우석이나 문국현 현상과 같다. 기술로 돈을 벌었고 검증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상을 만드는데 합격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열에 박원순 박경철이 줄 서있다. 그리고 그 뒤에 누군가가 또 계속 줄 서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허상에 대한 갈증의 줄이다. 그리고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의 짧은 기간 사이에 한국사회는 또 요동 칠 것이다.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를 구별이 되지 않은 기간이다. 참선지자는 없다. 그 누구도 Joseph Campbell이 말하는 영웅여정의 길을 밟고 있지 않다. Joseph Campbell의 영웅여정은 안철수나 박원순과 같은 흥행물이 아니다. 우상갈망의 현상은 사회정신분열증이 치유될 때까지 계속된다.

요즘 영웅여정을 걸어온 사람은 Che Guevara 다. 그가 과연 다시 영웅으로 신비적인 모험으로부터 인류에게 정신적 은혜와 물질적 이익을 가지고 돌아올지는 의문이다. Joseph Campbell 말하는 돌아온다는 말은 국민이 그를 唯一神話로 받아드린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南美는 벌서 그를 돌아오는 영웅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영웅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아 초자연적 모험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 즉 세상이 나와서 그를 영웅을 받아야 한다. 깊숙한 거처의 축복은 [깨여난 상태의 스스로 흩어진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세상과 단절하고 누가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하겠는가? 사람이 살고 있는 한 생명은 영웅을 부른다. 사회는 깊숙한 거처의 행복에 머물러있는 자를 질투하고 문을 두드린다. 만일 영웅이 의향이 없으면 문을 두드린 자는 기대하지 않은 충격으로 고통을 당할 것이나 부름을 받은 자는 - 주검과 흡사한 완전한 상태에 있는 극락에 밀봉 되어 – 지연된다 해도 아마도 구제되고 모험가는 돌아온다.

과연 우리는 정치를 이런 식으로 계속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한국국민은 허상(虛像)을 찾는 허상(虛想)에서 깨여나야 한다. 없는 영웅을 만들거나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우상을 찾는 국민의 갈증에 우상 행세를 하고 나타나는 허상들이 날뛰고있다. 최근 정치의 불안과함께 안철수, 박경철, 박원순에 이어 계속 나타난다.  

(註釋) 이타리체는 저자가 삽입한 것이며 Blastoclast라는 말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희랍어를 저자가 합성한 말이다. 파란색 문장은 千面英雄 (Hero with Thousand Faces)을 筆家가 번역한것이다.


필자 강성종 박사는 1969~70년 두 차례에 걸쳐 세계적 과학잡지 <네이처>에 논문을 게재한 세계적인 뇌과학자입니다.
현재 뉴욕에서 Biodyne Research Center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과 치매를 치료하는 새로운 약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보기 드문 진보·좌파 성향의 과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 주요 약력
한국인 최초 세계적 과학잡지 <네이처>에 논문 게재(제1저자-1969,1970년)
전 미국 뉴욕시립대학 마운트 사이나이 의대 교수(1968-94)
전 독일 막스프랑크연구소 교수(1975~78)
전 서울대 AID교수(78-79)
전 중국 천진대학 자문교수(86-94)
전 한효과학기술원 원장(89~95년)
현 뉴욕 Biodyne Research Center 연구소장(치매/우울증)

* 저서
<한국 과학기술 백년대계를 말한다>(라이프사이언스 펴냄)
<당신의 두뇌 안녕하십니까?>(라이프사이언스 펴냄)

* 강성종 박사 블로그 : http://quovadis.tistory.com/
* 강성종 박사 트위터 : http://twitter.com/quovadiskorea

Posted by 쿼바디스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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