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아는 사실이지만, 청일전쟁 이후 조정은 일본군대가 장악하고 있었고 조정은 꼭두각시로 일본이 시키는데로 했으니 대한제국, 황제가 무슨의미가있었겠습니까? 중국의 임낌을 배재하려는 일본의 침략적 의도에 따라  대한제국이 생겼고, 황제가 탄생했으니 이는 수치의 이름입니다. 한자 또한 부족국가 三韓삼한에서 유래한것은 만주를 누비던

朝鮮조선과 高句麗고구려를 역사를 제거하려는 일본의 의도임을 알아야합니다.
주석: 여기서 朝鮮조선이라함은 이성계의 朝鮮조선이 아니고 3000년전 중국의 여러나라들과 무역을 활발하게한 朝鮮조선입니다. 처음 朝鮮조선의 출처는 管子관자 (BC700) 에 기록되여있습니다.


1894
-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농민들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1)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2)로 나뉜다.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B%8F%99%ED%95%99%EB%86%8D%EB%AF%BC%EC%A0%84%EC%9F%81

 

1894 -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 7 25일부터 1895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战争 / 中日甲午戰爭),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清戦争),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부른다. http://ko.wikipedia.org/wiki/%EC%B2%AD%EC%9D%BC_%EC%A0%84%EC%9F%81

 

1895 -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음력 8 20(양력 10 8)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1]이라고 불렀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84%EB%AF%B8%EC%82%AC%EB%B3%80

 

1896 -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 2 11일부터 1897 2 20일까지 1년간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건청궁)을 떠나, 어가를 아라사 공사관 즉,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이다.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파천 당시에는 “파천”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나중에 붙인 명칭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C%95%84%EA%B4%80%ED%8C%8C%EC%B2%9C

 

1897 - 1897(광무 원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그 해 8 17일 광무(光武)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 3일 황제 칭호의 건의를 수락하였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나라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으며, 10 12일 원구단(園丘團)에서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들은 대한제국을 직·간접적으로 승인하였다. 그중 제정 러시아와 프랑스는 국가 원수가 직접 승인·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 독일 등도 간접적으로 승인 의사를 표시하였다.[7]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열강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즉위 직후인 11 12일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국장(國葬)을 치렀으며, 과거에 청의 사대관계의 상징이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자리에 독립문건립에 추진하여 11 20일에 독립문건립에 완공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C%A0%9C%EA%B5%AD

 

1904 - 1차 한일 협약(第一次韓日協約, 일본어: 第一次日韓協約)은 러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4 8 22일에 대한 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협약이다. 협약의 정식 명칭은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關한 協定書)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_%ED%95%9C%EC%9D%BC_%ED%98%91%EC%95%BD

 

1905 - 2차 한일 협약(第二次韓日協約, 일본어: 第二次日韓協約) 1905 11 17일 한국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을사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을사조약, 을사오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 부르기도 하며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 해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C%A0%9C2%EC%B0%A8_%ED%95%9C%EC%9D%BC_%ED%98%91%EC%95%BD

 

1910 -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 일본어: 日韓 (にっかんへいごうじょうやく)),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 한일합방늑약(韓日合邦勒約) 또는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 8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멸망하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성립한 당시에는 조약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종이 직접 작성한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D%95%9C%EC%9D%BC_%EB%B3%91%ED%95%A9_%EC%A1%B0%EC%95%BD

韓國 名稱

이 글은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70078 의 내용에 있는 韓國의 名稱 중 일부를 수정해서 올린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일본은 明治維新(명치유신) 이후 조선반도 침공의 명분을 쌓는데 주력한다.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라는 가설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19c부터 등장하는데 ‘倭馬韓辰韓弁韓’이라는 중국 ‘삼국지위지 동이전’ 이라는 역사책에서 倭보다 뒤지는 韓國을 기록한 역사기록을 내세웠다. 이를 근거로 조선정벌론자들은 任那(임나)가 韓國을 복속하였다는 조작된 사실을 공개적으로 떠들어 댔다.

 

일본에서는 조선정벌론이 활개치면서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시기이다. 당시 조선은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에 의해 강제로 외교관계를 갖고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를 근거로 한 조선침략이 점차 현실화 돼가는 시기이었다.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거치며 고종은 일본군대에 둘러 쌓여서 더욱 약해져 갔다.

러시아공관으로 도망친 俄館播遷(아관파천)도 일본의 각본이었다. 靑의 입김으로 부터 멀리 떨어트리려는 계략으로 일본은 고종에게 청과 같은 ‘황제’ 라는 명칭을 억지로 불려주며 국호를 조선침략의 모토인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의 韓國’을 모델로 일본지배의 당연성을 고취하기 위해 韓國, 大韓帝國으로 변경하게 된다.

 

혹자는 고종이 자주적으로 한국이라는 명칭을 썼다고 하나, 일본의 칼머리 앞에서 자주성을 발휘했다는 말은 과장된 억지에 불과하다. 더구나 일본앞잡이들이 청에 대한 사대외교를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는 소리를 하고있는 마당에 어찌 일본을 누르려고 작정했겠는가? 大韓이란 말은 三韓을 통합한 말이다.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의 근원이 되는 당시의 伽倻(가야)지역은 馬韓, 弁韓, 辰韓이라는 소규모의 미개한 韓國으로 불리는 약소사회가 주류를 이뤘다. 신라, 백제, 고구려로 이어지는 고대왕국으로 발전돼지도 못한 채 부족사회로만 알려진 韓國이 20세기에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 의 희생양 韓國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알고 있는 韓國은 남쪽지방만의 부족사회 三韓이다. 일본이 역사왜곡을 자행하며 일본식민지의 근거를 만들려 일본의 속국을 근거로 설정한 국호일 뿐이다.

이런 일본의 강제적인 설정과 협박으로 韓國의 비주체적 국호선정의 내막을 안다면 韓國이 크다, 넓다 의 韓國이 아니라 단지 일본침략기에 ‘任那(임나)의 속국 韓國’으로 알려진 국호임에 모든 자존심이 한 순간에 우르르 무너지는 아픔을 겪게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의 어원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고종말기에 나온 대한제국은 우스꽝스럽게도 자주자강의 힘찬 포효가 아니라 일본총칼 앞에 무릎 꿇은 우리의 역사적자부심을 말살하려는 억압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기존 조선왕국을 부정해서 일본식민지를 합리화하려는 계략의 산물이었다. 친일사학자들이 한국을 끄집어내어 후대에까지 연결시킨 것은 문화의 단절, 역사의식 不在이었을 뿐이다.

Posted by 쿼바디스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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